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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의 목소리 VOM 2014 10월호 이주민의 목소리 - 제 2회 외국인근로자 한국어 말하기 대회 최우수상 수상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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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30회 작성일 14.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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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센터에서 주최한 제2회 외국인근로자말하기대회 최우수상을 수상한 캄보디아 출신 두옹위볼(이하 위볼)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인터뷰는 10월 15일 오후 8시 위볼이 일을 마치고 센터로 찾아와 약 1시간동안 영어와 한국어로 진행되었습니다.

Q) 먼저 한국어 말하기대회 최우수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위볼) 감사합니다. 여러 선생님들과 주변 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리고 최우수상을 받았다고 하니 모두들 축하해주었습니다. 특히 우리 회사 사장님이 조회시간에 동료들 앞에서 축하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대회 발표할 때 제 뒤로 띄운 제 프로필에 우리 회사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을 보시고 자랑스럽다고 했습니다. 축하금도 10만원을 주셨습니다. 동료들도 박수를 치며 기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동료들에게 한 턱 냈습니다.

캄보디아의 아내와 딸에게도 자랑했습니다. 아내도 기뻐했고 딸(3세)은 아빠에게 축하보다 제가 부상으로 받은 아이패드을 달라고 졸랐습니다. 게임을 하고 싶답니다. (환한 아빠 미소)
Q) 회사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어떤 비결이 있나요?

위볼) 2012년에 고용하가제로 입국했습니다. 처음 회사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염산을 다루는 회사인데 장갑이나 필요한 안전장비를 제 돈으로 사라고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보호장비를 착용하지 못해 손과 발의 껍질이 다 벗겨졌습니다. (휴대폰으로 찍은 당시 사진을 보여 줌)

일도 힘들었지만 사람들 때문에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옮겼습니다. 지금 회사는 주물로 자동차부품과 선박부품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일은 어렵고 힘들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좋습니다. 한국 사람들 뿐 아니라 캄보디아, 베트남 동료들도 있습니다. 한국 노동자는 나이든 어른들뿐입니다. 한국인 어르신들도 우리도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서로를 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이든 선배들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고 선배들은 우리를 아들처럼 대해줍니다. 좋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은 비결보다는 행운인 것 같습니다.

Q) 한국에는 어떤 계기로 오게 되었나요?

위볼) 2011년 대학을 졸업하고 2012년 7월 한국에 오기 전까지 사립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캄보디아는 경제상황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교사 월급으로 가족들(아버지, 고등학생 동생들, 아내와 딸)을 부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밤에는 모토돕(오토바이 택시)을 운전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아는 사람들이 볼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중생활을 했습니다.

사실 캄보디아에서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많이 없고 일을 구해도 월급만으로 생활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국 공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사람들의 학력은 높은 편입니다. 캄보디아 대학생 20-30% 정도만 진정한 학문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나머지는 한국과 같이 발전된 국가의 공장으로 일하로 가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정말 슬픈 현실입니다. 저도 낮에는 영어교사, 밤에는 모토돕 운전을 했지만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가족들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영어교사가 왜 한국에 왔냐고 물으면 정말 창피합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무능력하다는 것을 말해야 하니... 한국은 공장에서 일해도 캄보디아 교사로 일한 것보다 수입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외국의 공장에서 일하고 싶지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캄보디아의 장래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이지요.
Q) 발표 내용에는 캄보디아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정도면 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 같은데 어떤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수도인 프놈펜에서 몇 시간 떨어진 캄퐁톰이라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서 은행에 빚을 갚지 못해 집과 땅을 몰수당했습니다.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영어만 잘했고 다른 과목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할 때 장학금을 받지 못해 등록금 때문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한 학기 등록금이 280불정도 되었는데... 한번도 제때 등록금을 내지 못했습니다. 대학의 행정처에 찾아가 분할납부 신청을 하였고 매번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았습니다. 여러 가정을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어떤 집에서는 과외비로 식사를 해결하고 어떤 집에서는 돈을 받기도 했습니다. 대학 3학년 때부터는 과외비가 안정적으로 들어왔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아내의 헌신으로 등록금 걱정 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부모가 이혼하여 거의 고아나 마찬가지라서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고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귀걸이 목걸이 화장품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 많이 미안합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 그래도 아내가 제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 믿습니다.

Q) 늦은 시간까지 붙잡고 있어 미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위볼) 처음 회사에서는 한국 사람들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지금 회사는 사람들 때문에 아주 좋습니다. 이제는 한국 사람들의 스타일과 음식, 뭐 이런 것들이 이해됩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배려도 느껴집니다. 인간관계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고 사람들에게 배우고, 새로운 경험을 많이 쌓고 싶습니다. 공장에서 일만하지 않고 한국문화도 배우고 공장 밖의 세계도 많이 경험하고 싶습니다.

Q) 잔업하고 오셔서 늦은 시간까지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위볼) 감사합니다. 저에게도 좋은 경험입니다. 감사합니다.^^

글/인터뷰 : 이인경 (부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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